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

누가 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보고 싶어 열어놨어요.

과거회상, 그리고 지금의 회복과 조절

김영진
2020-03-30
조회수 1775


학창시절, 내 감수성은 꽤나 영민했던 것에 반해 

그 당시 안성 뿐만아니라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컨텐츠는

조폭이나 건달, 일진미화에 급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 표현하고 자라고싶었지만 김현태씨의 아들은 남자라면 남자답게라는 명목하에 자랐어야 했다.

우리가족은 각 손주들끼리 경쟁을 부치기 급급했고

누가 더 장손감이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큰아빠가 엄하고 남자다움을 강조함에 반해 

장손인 사촌형이 오히려 용기있게 여성스러운 면을 드러내

형은 미술을 하거나 보석가공에 관심을 보여 그 곳으로 향했다.

내 손은 예쁘다고 핀잔을 주는 큰아버지가 형에게는 아무말도 안할때는 너무 어이가 없었고

할머니도 내가 갈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돼지새끼야 그만먹어 니형줘야돼라고 하는데 

결국 끝까지 우리할머니 챙긴건 나였다. 뭐 아버지 영향도 있었지만 여튼 이상한 장손컴플렉스도 이 때 획득했다.


그래서 글쎄 되게 부모님께 의존하면서도 지독하게도 효자노릇을 하고 싶었기에 

그 형보다 나은 '장손인 남자다운 아들'의 모습을 띄고 싶었다.

운동은 잼병이면서 운동은 여기저기 껴야했고, 친구들과 거친말을 내뿜으며 경쟁에서 이탈하지 않았어야했다.


그래서 결국 인간관계도 서툰 탓이었나 왕따도 되고, 평생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그 맘쯤이 아버지 사업도 안좋았던 건 아닌데 소송에 휘말려 술주정도 많이 당했고

그래서 학창시절은 꽤나 터프했다고 기억한다.

정상적인 삶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 덕에 생긴 "장손이니까 - 남들보다 나은 삶"에 대한 승부욕을 다스려야했고

그나마 다른 사람들에게 승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앉아서 할 수 있는 공부 또는 게임이었다.


뭐 둘다 미친듯이 했지만, 운이 좋아 그 중 그나마 공부를 택하게 된다.

경쟁이 심했던 비평준화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위안을 받는일이었기에, 다른 일상은 더 찾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서 어떻게든 좋은 컨텐츠를 시골에서도 접할 수 있고,

안성도 그사이에 많이 발전해서 따라오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어쩐지 접할 수 없었던 것들이 넘쳤다.

내가 살던 안성은 이렇다한 영화관이 없었고, 이렇다한 전시회장도, 패밀리레스토랑도 없었다.


그러다 입학한 스무살 대학교 초반. 

-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영화 10편은 단 한편도 본 적이 없는 나

- 패밀리레스토랑을 12살에 가고 한번도 가지 않은 나

- 피자는 2년에 한번 먹을까말까한 나

- 드라마나 예능은 볼 시간이 없었던 나

- 그 흔한 당구도 안했던 나

> 게임 이외의 주제로 다른애들과 대화 거의 불가

나는 그냥 피자집에 가서도 긴장했어야했고,

빕스나 아웃백을 가서도 긴장했어야했다. 가던 곳이 그저 김밥천국 뿐이었기 때문에.

본성이 소심한 탓에 전화주문을 제대로 하는 것 또한 아마 그 스무살 무렵이 거의 처음이었다.

배달음식을 하는 가게에 시골집인 우리집을 설명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고,

헤매는 배달부를 차마 볼 수 없어 전화를 잘 못했다. (여전히 내가 배달을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튼 그무렵, 얼마나 연애는 하고 싶었을까. 뭘 좀 알아야 이야기를 나눠야하는데

영화도, 드라마도, 먹는법도 아 무 것 도 모르고 그냥 선배들이 말하는 걸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그래서 그렇게 처음 친해진 선배들과 일만 잘하면 되는 학생회에 집착을 했다.

인간관계 때문에 무언가를 못하는 내자신이 싫어서 그 땐 정말

12-14시간씩 아니 아마 18시간정도는 네이트온-싸이월드에서 이야기를 하고 

매일같이 술자리를 따라다녔다. 자취방에 들어와선 영화니 예능이니 닥치는대로보고..

사람이 궁금해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게 정답일까가 궁금해서.


그러다 들어간 군대, 그리고 그맘 쯤 빈지노가 등장했을것이다.

유난히 좋아했던 대중음악이 힙합이었기에, 그사람을 열심히 관찰했다.

그 덕분에 생긴 인스타그램 계정이 지금 7년정도가 되었다.

그사이 팔로워가 1260명이 되었는데, 실질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200여명뿐.

그 중에서도 한 100명정도?만 많은 영감과 좋은 정보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정보를 찾을 때나 문화기획을 할 때는 이 관찰이 장점이었지만 너무 집착한다.

인스타그램을 많이 지워도 봤지만 웹으로든 어떻게든 들어가서 

접속조절하는 것을 실패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담배를 안피는 대신에, 게임을 안하는 대신에, 

SNS와 미디어나 각종 콘텐츠라도 많이 봐서 

대화를 잘하자고 생각한 내 전략이

왜 신현준씨가 그러듯 금연은 했는데 금연껌을 못끊는 상황으로 와버렸다.


며칠 전 문득 너무 집중을 못하니까 내가 성인 ADHD이 아닐까 싶어 검색해봤는데

활동적인일을 너무좋아하고 집착하고 

잠시도 집중을 못하는 내 자신, 그리고 재단에서 스케쥴대로 일도 못끝내고

일을 맨날 밀려서 허덕이던 내모습. 그 모습이 너무나 일치했다.

어이없게도, 그런 내가 싫은게 아니라 나를 알고,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별에 별 조건을 다 딛고 또 새로운걸 하고 사느라, 이게 생겼던 것이고 집중 못하는게 이상한게 아니었구나....."


해외생활은 생각보다 순조로운 것에 반해 약한 집중력이 수면위로 다시 떠올랐다.

해외여행도 이상하게 불효를 저지르는 느낌이 들어서 내 손으로 가겠다고

처음으로 외국을 나가본게 스물여섯살 크루즈에서 하는 봉사활동 때였는데도,

마치 여기에 오래 산 사람만큼이나 잘 돌아다니고 잘먹고산다.

(내가 외국생활을 이어나가는 건 아마도 한국에 산다는게 외국에 사는거 만큼이나

누군가와 같이있지만 외롭고 힘겨운 일이 연속될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마 확실히.)

여튼 5주간 약한집중력과 함께 맨땅에 헤딩 열심히 하고있다. 그 덕에 반성도 할겸, 선언도 할겸 여기로 왔다.


일단 오늘 쓰는 건 첫번째로 핸드폰을 쓰는 시간관리를 잘해야했다.

학생으로 다시 돌아오고 나선 하루에 핸드폰을 쓰는 시간이 거의 7-8시간이 되었다.

나는 늘 인스타그램을 수도없이 반복해서 보고있다.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습관이 되어서.

여기 오기 전까지는 기획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캠페이너로 일할 때는 요긴하게 쓰이긴 했다. 

이게 내 장점이니 더욱 전파시키고, 내가 가공한 정보를 나누며 이야기하며 그 반응을 살폈어야했다.


지금도 역시나 사진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애용한다.

하지만 조금의 디톡스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학기가 시작한지 5주차가 됨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양을 아직 소화하지 못하는데 그 도피를 인스타그램에서 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건강하게 사용해야겠다. 내가 스스로 그 활용시간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가끔은 메세지를 보고도 답장을 안하고 지켜보는 날을 만들고

애타지말고 심호흡하고 여유있게 답장을 해야한다.

카카오톡 또한 1이 생기는걸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다 읽는편인데,

이 또한 단톡방은 좀 쌓이게 두는 걸 다시 연습해야한다.


어린애마냥 이렇게 하나하나 분석하고 관리해야하는게 너무 애석하지만

내 상황의 원인은 이랬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지금은 시도하고 있다.

지금도 글로 명확하게 정리하고 나중에 또 읽으면서 다짐을 새겨보고자 글로 옮겼다.

그 동안 박살난 멘탈을 주섬주섬 모으느라 했던 SNS에서 이제는 더 건강하게 이용하는걸로

이제 그렇게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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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지방에서 유년기를 자란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되었네요

부제 : 지방에서 유년기를 자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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